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
수용소에서의 일화를 보면,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가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즉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자유를 뺏을 수 없다는 말이다. 수용소에서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들은 빠르게 목숨을 잃어나갔다. 하지만, 의미를 가지고 끝까지 살아갔던 저자는 결국은 살아남았다.
우리는 항상 고민과 권태 사이를 무수히 왕래한다. 권태는 우리를 우울로 이끌고, 삶을 의미 없게 만든다. 저자는 이를 실존적 공허라고 말한다. 실존적 공허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나는 이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불행은 왜 생기는가?
우리는 항상 사랑 받고 싶고, 행복하고싶다. 그러나 이 단어들은 추상적 개념이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추상적 개념은 어떻게 해도 우리의 삶에 가까이 오지 못한다. 그것이 구체화 될 때만 우리에게 조금이나마 가까워지게 된다.
행복을 추상적 가치로만 가지거나, 행복을 구체화한 하나의 매개체를 잃은 결과는 불행이다.
불행은 별 거 없다. 단어를 보자. 不倖, 행복하지 않은 상태이다. 행복하지 않으니 불행한 것이다. 혹은, 행복했던 무언가를 잃어서 더이상 나에게 행복이란 없다고 생각하여 불행은 찾아온다. 정확히는 행복이 떠나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불행한 사람은 과거에 몰두하고 집착하며 불행의 이유를 찾는다.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은 사람을 퇴행하게 만든다.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의 잘못을 탓하며 되돌릴 수 없다고 자책한다. 물론, 성찰은 중요하다. 그러나 과거에 몰두하면 현재 삶의 의미를 잃게 하며, 결론적으로는 미래의 삶도 잃게한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행복은 우리가 행복이라는 추상화된 가치를 어떻게 구체화 하냐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구체화된 하나의 매개체를 잃는다 해도, 새로운 매개체를 구체화 하면 행복은 유지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행복을 구체화 할 수 있을까?
행복은 어떤 것에 의미를 붙일 때 나온다. 추상 상태인 행복을 구체화 상태로 바꾸기 위해서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의미를 붙이기위해서는 근거가 필요하다. 우리는 근거가 없으면 어떤 의견도 쉽게 신뢰하지 않는다. 하물며 자기자신에게 제시하는 의미에는 더 강력한 근거가 필요하다. 근거가 없이 구체화된 행복은 그만큼 쉽게 사라진다.
근거는 경험에서 나올 수 있다. 물론 다른 것에서도 나올 수 있겠지만(여론, 사람들의 인정), 그것은 그만큼 이뤄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예를들어, 브랜드 가치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가치이지만, 이를 얻어내기 위한 소비는 돈을 필요로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명품브랜드는 더 구입하기 어려운, 많은 돈을 필요로 한다.
좀더 크게 보면, 돈은 대부분의 물질적 가치와 교환될 수 있다. 하지만 한 사람이 돈을 매우 많이 벌기에는 한계점이 분명히 존재하고, 정말 돈을 많이 가져 대부분의 물질적 가치를 얻을 수 있게된다면, 역설적이게도 물질적 가치는 행복이라는 의미를 잃게된다.
물론 돈을 추구하고, 브랜드 가치를 믿고 소비에서 행복을 찾는다면 그것이 잘 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속가능한 행복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부분적인 행복은 인정하지만, 그것만 추구하지는 않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지속가능한 행복을 만들려면 의미를 부여해야하고, 그를위한 근거인 경험이 필요하다.
저자는 경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그대의 경험, 이 세상 어떤 권력자도 빼앗지 못하리! "
우리는 경험을 통해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경험을 통해 행복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것, 평범한 것들을 행복이라 깨달을 수 있다. 가족 중 한 명이 다치거나 아프면 그제서야 우리는 가족이라는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고는 한다. 이처럼, 역경이라 할지라도 이후에는 행복이라는 가치를 구체화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는 좋은 경험뿐만 아니라 역경도 포함한다.
저자는 역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나 혹은 자기 인생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시련의 불가피성이다. 이런 시련의 도전을 용감하게 받아들이면 삶은 마지막 순간까지 의미를 갖게 되며, 그 의미는 글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보존된다. 다시 말해 삶의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시련의 잠재적인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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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쳤을 때에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유일한 인간의 잠재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잠재력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
삶에서 마주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한다. 따라서 실제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바뀔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된다는 말이 추상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말과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추상적인 것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 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책 내용 가장 놀라웠던 것이 시련을 대하는 저자의 태도였다. 보통 사람들은 왜 나만 이렇게 힘든가라고 생각하는데,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과제" 를 받은 "유일한 사람" 이라는 사실에 감사한다고 했다. 추억과 역경을 통해 우리는 더욱 더 자기 자신으로 거듭난다. 모두가 자기만의 짐을 짊어지고, 경험을 통해 행복, 나아가 자기자신으로 향한다.
경험은 행복을 구체화 하고, 구체화된 행복은 살아갈 이유로 남게된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어떤 이유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행복을 찾는 데에 큰 힘이 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사건사고도 많고 하지만 결국엔 다들 행복했으면 좋겠다.